[Artist Note]
’금생반련‘에서 ’시간지옥‘까지. 두 앨범을 관통하는 세계관 「SAKYO」의 엽편(葉篇)입니다.
글을 읽고 난 뒤, 앨범을 한번 더 감상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꽃다발을 샀다. 이름은 아네모네. 이 붉은 꽃이 누구의 피를 머금고 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꽃집 안은 이상할 정도로 밝았다. 습기를 머금은 생화 냄새가 비릿하게 코를 찔렀다. 나는 그 밝음이 불편해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주인은 나를 힐끔거렸다. 곪은 폐에서 긁혀 올라오는 쇠 맛 섞인 숨소리가 낯설었을 테다. 설렘은 매마른 지 오래였다. 다만 꽃집에 들어서자마자 붉은색이 내 눈을 찔렀고, 평생 꽃구경 한번 못 해봤을 네가 떠올랐을 뿐이다.
주인은 꽃을 포장하며 무슨 말을 중얼거렸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대답 대신 마른기침을 삼켰다. 아네모네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도 아무 감정이 없었다. 이름이든 의미든, 그런 건 늘 뒤늦게 갖다 붙이는 변명이었으니까. 나는 왜 이 꽃을 골랐는지 스스로에게 설명하려다 말았다. 설명이 필요한 선택은 아니었다. 그냥 이 꽃이 여기 있었고, 내가 그 앞에 섰을 뿐이다.
네가 좋아할까. 사실은 알고 있다. 네가 꽃 따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 애초에 나를 사랑한 적조차 없다는 것을. 나의 고백은 사랑이 아니었다. 폐병에 걸려 남은 생을 토해내던 나는, ’곧 죽을 사람의 마지막 소원‘이라는 비겁한 말로 네 숨을 막았다. 너는 지나치게 착해서, 혹은 다 죽어가는 짐승에 대한 지독한 동정심 때문에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네 눈동자에 서린 것은 설렘이 아닌, 깊은 체념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내 곁에 묶여 있기만 하면 됐다.
익숙한 사이렌이 고막을 찢었다. 나는 규칙적인 박자에 맞춰 잿빛 보도블록을 밟았다. 한 발, 한 발. 거의 다 왔다. 차가워야 할 공기가 이상하게도 뜨겁다. 내 발에 신겨진 하얀 신발과 잿빛 보도블록의 색이 죽은 듯 닮아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멈춰 선 곳에서 타버린 것들의 단내가 콧속을 휘저었다. 녹아내린 것들의 독한 냄새가 폐를 긁었다.
무너져 내린 지붕 위로, 네가 뱉어낸 마지막 아지랑이가 나를 조롱하듯 춤을 추고 있었다. 손등 위로 내려앉은 검은 재가 눈처럼 내려앉았다. 이것이 너의 남은 온기인지, 아니면 네가 그토록 아끼던 악보들의 잔해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수없이 상상해 온 이별이었다. 내가 먼저 죽고, 네가 홀로 남는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이런 방식일 줄은 몰랐다.
발은 바닥에 붙은듯 떨어지지 않았다. 열기에 바스러진 꽃잎이 손안에서 힘없이 꺾였다. 비틀린 모양새가 꼭 억지로 널 곁에 두었던 나를 닮아 있었다. 너는 얼마나 아팠을까. 불 속의 네 모습이, 잔인하게도 나보다 가벼워보였다.
손등 위로 한때 너였을 것들이 차갑게 식어 바스러졌다. 이제는 아무 소리도 냄새도 없다. 이상한 일이다. 오늘이 죽었다. 너를 놓칠까 전전긍긍하던 그 지겨운 불안이 숨을 거뒀다. 기뻐야 마땅한데, 불쾌한 감각은 날이 선 채 목구멍에 걸려있다.
낯섦이다. 밖을 떠돌던 네 비명이 이제는 고막 안쪽으로 가라앉는다. 발밑을 보았다. 온통 잿빛인 폐허 속에서 유일하게 색을 잃지 않은 것이 있다. 네가 선물했던. 아니, 내가 졸라대어 받아냈던 신발이었다.
이게 여기 있으면 안 된다. 네가 없는 지옥을 밟기엔 지나치게 하얗다. 나는 신발을 벗어 품에 안았다. 앙상한 맨발을 아스팔트 위에 두고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차가웠지만, 곧 감각이 흐려졌다. 사람들이 없는 길만 골라 걷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이면, 이 행위가 벌이 아니라 연출처럼 보일까 봐서였다.
차가움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올수록 마음은 오히려 편안해졌다. 비로소 안심된다. 너는 도망치려 했으나, 결국 재가 되어 내 머리 위로,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한 걸음마다 하루의 죄가 깎여나간다면, 나는 얼마나 더 걸어야 네 앞에 설 수 있을까. 수천 번의 죽음을 홀로 견디는 것. 그것이 너를 억지로 가졌던 대가라고,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비릿한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안도도, 죄책감도 아닌, 명백한 억울함이었다. 죽음까지 내세워 널 붙잡았는데, 적어도 끝까지는 내 것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 네가 남긴 것은, 평생을 맨발로 걸어도 끝나지 않을 지옥뿐이었다.
발이 걸려 넘어질 뻔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숯덩이가 내 발치에 놓여 있었다. 아, 네가 날 붙잡은 건가.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얀 신발이 더러워질까 봐, 오른손에 든 꽃다발을 으스러지라 움켜쥐었다. 가시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때였다. 죽은 줄 알았던 꽃이 내 피를 마시고 기괴한 숨을 틔웠다.
손바닥의 피부가 얇은 종이처럼 찢기더니, 날카로운 뿌리가 살을 뚫고 혈관을 찾아 들어왔다. 끔찍한 고통이어야 했다. 그런데 숨이 고르게 가라앉았다.
거부하지 않았다. 이 꽃이 내릴 뿌리는 흙이 아닌, 죄로 문드러진 내 속이라는 것을 직감했기에. 고막을 괴롭히던 마지막 숨소리가 마침내 멎었다. 끝인 줄 알았던 그때, 하얀 꽃잎이 머릿속을 덮었다. 이름도 붙이지 못한 감정이, 마침내 제 자리를 찾은 듯 가라앉았다. 너는 기억 속에 눕혀둔 시체가 아니라, 내 머리 위에서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이 되었다.
줄기가 손목을 스쳤지만, 나는 그대로 두었다. 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우리는 옮겨가기 시작했다.
몇 번의 걸음을 옮긴 뒤였다. 갑자기 세상이 울렁거렸다. 방금 밟았던 잿더미가 시야에서 멀어지고, 매캐한 연기가 거짓말처럼 걷혔다.
다시 손등 위로 차가운 검은 재가 내려앉고 있었다. 재였다. 아니, 눈이었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익숙한 사이렌 소리가 멀리서 다시 들려왔다. 처음 듣는 소리였지만 지독하게 익숙한 리듬이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았다. 가슴 한구석이 텅 빈 것처럼 시려왔다. 무언가 해야 했다. 빈손이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나는 다시 몸을 돌렸다. 저기, 유난히 밝은 꽃집이 보였다. 꽃다발을 사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이 이야기는 끝없이 반복됩니다.
‘꽃이 피다’라는 의미의 꽃 필 소(咲)와 ‘미치다’라는 의미의 미칠 광(狂)을 결합했습니다.
이는 “미친듯이 피어나다” 혹은 “광기가 개화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앨범 커버 속 SAKYO(咲狂)의 머리에 피어난 꽃인 아네모네는, 그리스 신화 속 죽어가는 아도니스가 흘린 피에서 피어난 꽃입니다.
행복한 결말은 없습니다. 반복되는 꽃말만이 이 동화의 유일한 언어입니다.
“내가 원하던 삶은 이런 게 아니지만, 그것도 어쩔 수가 없어 너의 이상형을 바꿔, 그렇게 타협하며 사는거지 뭐, 억지로 고백을 받아준 너처럼”
「잔혹동화 : 시간지옥」 2. 회전목마 中“나의 고백은 사랑이 아니었다. 나는, ’곧 죽을 사람의 마지막 소원‘이라는 비겁한 말로 네 숨을 막았다.”
「SAKYO(咲狂)」 中“잘못했던 건 넌데 아픈 건 난데 어떡해”
「단편영화 : 금생반련」 1. 너가준신발조차도아껴왔지만 中“죽음까지 내세워 널 붙잡았는데, 적어도 끝까지는 내 것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 네가 남긴 것은, 평생을 맨발로 걸어도 끝나지 않을 지옥뿐이었다.”
「SAKYO(咲狂)」 中“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서로의 두 손을 맞잡고, 그렇게 평생 잊혀지며 우리 서로 사랑하자”
「단편영화 : 금생반련」 2. 사이코패스의 짝사랑 中“너는 기억 속에 눕혀둔 시체가 아니라, 내 머리 위에서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이 되었다. 아무도 찾지 못할 곳으로, 우리는 옮겨가기 시작했다.”
「SAKYO(咲狂)」 中“반복되고있어, 여기엔 끝이 없어 이 지옥같은 삶에서 꺼내줘 멍청했던, 어쩌면 순수했던, 그때로 날 보내줘”
「잔혹동화 : 시간지옥」 2. 회전목마 中“꽃다발을 샀다.”
「SAKYO(咲狂)」 中
확정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는 끝까지 그렇게 믿었습니다.